오늘은 금요일이고 학교에 다녀왔으니까 화요일까지 정해진 일정이 없다. 수업은 오늘도 재밌었고(그래도 바보 같은 소리를 해서 분위기를 띄우던 미국인 남자애가 안 와서 좀 가라앉은 분위기였다), asomerse는 por와 함께 쓰는 것도 배우고, 읽기를 잘한다고 칭찬을 들었고, 아 가르시아 마르케스 이야기도 했는데 백년의 고독을 너무너무 좋아하고 열번 넘게 읽었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한국인답게 조용히 수업만 들었다. 끝나고 나서 트레이시에게 서점이 어딘지 알려주었고, 학교에서 나와서 역 쪽으로 걸어가다 보면 식당이 많은데 그쪽에 있는 패스트푸드점에서 핫도그 세트를 먹고 왔다. 소시지보단 감자튀김을 오랜만에 먹어서 너무 좋았다. 콜라를 코크라고 할지 콜라라고 할지 몰라서 그냥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이거 달라고 했다. 거기 직원은 친절한 남자애였는데 나보다 한 열살정도 어려보였다. 여기 애들도 학비를 벌기 위해 알바를 하겠지? 시급제로 받는지, 월급으로 받는지, 시급은 어느 정도인지 궁금하다.

뭐랄까 여기 사람들이 여자한테 친절하다는걸 알 것 같다. 집주인도 버스 노선을 좀 알려달랬더니 약도를 그려 주면서 직접 정류장에 데려다 줄 정도로 친절했고(아마 에어비앤비 평점이나, 내가 집을 몇주정도 더 계약하길 바라면서 그런 거겠지만) 좀 헤매고 있다던지 하면 도와주려고 하는 것 같다. 남미식 마초이즘이 이런 거겠지.

오늘은 버스 타고 집에 오는데 베네수엘라 남자 둘이서 버스에 타서 승객들에게 이제 휴지조각이나 다름없다는 자기네 나라 화폐를 나눠주면서 베네수엘라에서 넘어와 힘들게 살고 있지만 그래도 부끄러운 일을 하며 살고싶진 않습니다 도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콜롬비아 형제 여러분...이런 뉘앙스의 말을 했는데 나는 또 스페인어를 모르는 척 했다. 개인적으로는 베네수엘라인들을 돕고는 싶었지만 지하철도 아니고 버스에서 아직 핸드폰이나 지갑을 꺼내는 게 괜찮은 일인지 모르겠고 주머니엔 200페소밖에 없어서... 그런데 버스에 앉은 사람들이 돈을 돌려줄 때 나도 주려고 했더니 그 베네수엘라 남자 둘은 웃으면서 기념품으로 가지라는 뉘앙스로 열심히 자기들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고(전에 사탕 준 남자도 그랬는데 느낌이 뭐랄까.... 내가 살게! 내가 내는 거야! 이런 느낌이다) 웃으면서 엄지 척 하고 내렸다. 내 옆옆에 앉아 있던 콜롬비아노 아저씨도 같이 웃었다. 손에 쥐어진 빳빳한 천 볼리바르짜리, 아르마딜로가 그려진 보랏빛 베네수엘라 지폐를 보니까 기분이 이상했다. 한때 차베스의 정책들이 베네수엘라에서 어떤 사회적 변화를 이끌어냈는지에 대한 책을 찾아보던 때가 있었는데. 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가게 될 지 걱정이 되었다.

조금 그런 느낌도 들었다. 이 사람들이 보기에 나는 여행자+젊은 미혼여성이니까, 그리고 그게 아시아인이 되었든 어디 사람이 되었든간에 젊은 여자에게 적선을 받는다기보단 차라리 베푸는 입장이 되고 싶어할 거라는 생각이다.

집에 와서는 속옷 빨래를 했다. 얼른 클라라네 사무실에 가서 수업 청강하고 싶다고 말해야 하는데 귀찮아서 그만... 다음주엔 꼭 하자. 아 그리고 다음주가 세마나 산타가 아니고 그냥 다음주 월요일만 쉬는거였다. 무슨 성인의 축일이라고 했는데 누군진 까먹음;; 빨래를 마치고 널 때까지만 해도 화창했는데 어제랑 똑같이 또 널고 나서 한시간쯤 있으니까 비가 스콜처럼 쏟아진다. 다행인건 그래도 빨래가 마르긴 마름...

보면 하이로 선생님은 외국에서 살다왔다고 한 것도 그렇고 되게 덜 콜롬비아노같은 사람이다. 가끔 보면 실수로 잘못된 나라에서 태어난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있는데 하이로 선생님도 약간 그렇다(약간만. 본인은 아니라지만 가끔 완전 콜롬비아노같은 모습이 보일때도 있다). 그래서 지구반대편까지 와서 생활할 수 있었겠지만 말이다.

어젠 우울해하면서 일기를 쓰고 하릴없이 누워있다가 남자친구 전화를 받고 다시 행복해졌다. 어떻게 우울했는지 귀신같이 알고 전화를 했지? 무서운녀석... 어쨌든 그래서 다시 기운을 차리긴 했다.

내일은 일어나서 날씨가 좀 괜찮아 보이고 기운이 나면 과타페에 가보려고 한다. 아니면 일요일이나. 아니면 월요일이나... 집에만 있는 것도 심심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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