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84일 째
어제 남자친구랑 카톡을 하면서(징징거리면서) 불안한 마음을 진정시키고 아침에 일찍 일어났다. 아침에 사람이 가득한 버스에 앉기 싫어서 평소에 나오는 것보다 15분 정도 일찍 나왔다. 학교에 일찍 도착해서 쓰기 연습을 하면 되니까. 가면서 틈틈이 메일을 확인했는데도 역시나 미그라시온에서는 예약 완료 메일이 오지 않았다. 학교에 도착해서는 야생동물 보호와 원주민 전통 존중에 대해서 글을 써봤다. 사실 B2에서 저런 주제를 다루는지는 모름. 그냥 갑자기 생각나서 써본거였다.
교실에 들어가니까 어제 못 본 학생이 한명 더 있었는데 독일 남자고 스코틀랜드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다고 했다. 이렇게 학생이 총 4명이고 나 빼고 다 코카시안이군... 이전 클래스에선 동북아시아인은 아니더라도 어쨌든 아시아인이 있던지 아니면 유색인이 있었는데 이번엔 다 백인들이라서 굉장히 소외감이 든다. 같은 아시아인이나 아니면 아프리카인은 별로 선입견 같은 게 거의 없는데(아예 동북아시아인들에 대해 잘 모르니까) 얘네들은 지들이 백인이고 서유럽 아니면 미국에서 와서 그런지 <동북아시아인=공부만 할 줄 알지 사교성 없어서 반 친구들이랑 사귀려는 노오력따위 안함> 완전 이런 이미지로 나를 바라보는 것 같았다. 심지어 선생님까지... 에휴 알게 뭐야 지들이 그렇게 생각하든 말든. 어차피 2주만 보고 말건데. 생각해 보니 저번에 인텐시보로 바꾸면서 이런 반에 올 거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디아나 선생님이랑 같이 했던 수업은 예상보다 훨씬 더 분위기가 부드럽고 좋았는데...... 이번 클래스에는 정말 정이 안 가고 2주동안 수업 들을 생각을 하니 짜증이 날 뿐이다. 그냥 얼른 끝났으면.
어쨌든 수업이 끝나고 나서 미그라시온에 보낸 메일의 진행 상황을 봤더니 역시나 반려되어 있었다. 그래서 이거 그냥 무턱대고 미그라시온에 가면 되냐고 물어보려고 클라라의 사무실에 갔는데 클라라가 없었다. 그래서 수업이 불만족스러워서+비자 문제 때문에 짜증이 난 채로 점심을 먹으러 갔는데 점심마저도 먹기가 싫었다. 편의점 같은 곳에서 간단히 브라우니랑 요거트를 사서 테라스에 앉았는데(이번에도 5층 한가운데 앉아 있다가 파울라가 발견하고 이따 수요일 프로그램 오라고 할까봐 이번엔 바깥테라스 멀찍이에 앉음) 요거트 뚜껑을 뜯다가 오늘 그냥 미그라시온에 가보자! 라는 생각이 나서 진짜로 그냥 가 봤다. 어차피 메일로 예약 확인 여부도 안 알려줄거면 금요일에 갈거 이왕 시간이 있는 김에 한번 가보자는 거였다. 참고로 이 예약 확인 메일은 아직까지도 안 옴... 아무래도 영영 안 올 것 같다. 그럴거면 뭐하러 인터넷으로 예약 신청을 받는 거니 콜롬비아 이민청아.
그래서 당장 버스타고 벨렌으로 갔다. 처음에 벨렌에 이사올때는 미그라시온 위치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고 순전히 운으로 이리로 온 건데 웃기게도 미그라시온은 집에서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통학하는 버스 다니는 곳에 있었다. 근데 너무 긴장을 해서인지 벨렌 공립도서관 역에서 내려야 하는데 세 정거장이나 일찍 내려버렸다(메데진 버스는 이번역이 어디인지 안내따윈 안 나옴ㅋ 알아서 내려야함. 대신 아무데서나 벨 누르면 세워줌). 그래서 조금 걷고... 미그라시온이라고 써져 있는 곳에 갔는데 처음엔 많은 네이버 포스트들이 말하듯 잘못된 곳으로 갔더니 거기 있던 사람들이 여기말고 나가서 한 골목 더 가서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있다고 했다. 거기서부터 나는 잔뜩 쫄아서 굉장히 공손해졌고... 진짜로 내가 볼일을 볼 수 있는 미그라시온에 갔더니 가드같은 정복을 입은 사람이 차례대로 앉아 기다리라길래 기다렸다. 의외로 줄은 꽤 빠르게 줄어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앞에 있는 창구에 가서 왜 왔는지 말하고 내 서류랑, 여권이랑 내가 그동안 보냈다가 빠꾸먹은 메일에서 받은 예약번호(니들이 거절해서 직접 왔는데 도대체 이걸 여기서 다시 확인하는 이유가????? 이유를 아는 사람이 있다면 진짜로 묻고 싶다)를 확인하고 나서 그 사람이 옆에 있는 의자들을 가리키면서 여기 앉아있다가 이름 불리면 가라고 했다. 그리고 거기서 또 기다림... 근데 구글맵스 리뷰 등등을 보면 아침 일찍 가는 걸 권장한다느니, 하루종일 기다렸다느니, walk-in을 안 받아준다느니(예약 없이 가면 안 받아준다는 얘긴데, 근데 이 워크인이 내가 위에서 말한 퇴짜맞은 메일조차도 안 보내고 그냥 가는 걸 말하는 거일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참 쓸데없는 절차들을 많이도 만들어 두었다. 나는 이 워크인이 전화나 인터넷으로 하는 방문 예약인줄 알고 가기 전까지 안될까봐 걱정을 또 했다)하는 후기들이 엄청 많아서 미그라시온이 문을 닫을 시간까지 기다릴 각오를 하고 숙제를 했다.
그런데 한 25분 정도 지나니까 내 이름을 부르길래 일시적으로 엄청나게 굽신거리는 사람이 되어 거만하게 앉아있는 공무원 아저씨에게(웃긴 게 구글맵스 리뷰에 불친절하고 옆사람이랑 잡담하고 헛걸음하게 만든다고 두 번 이상 이름까지 거론이 된 사람이었다) 갔다. 근데 모든 절차들이 놀라울 정도로 금세 끝나버렸다. 내 서류랑 여권이랑 신상정보 확인하고 연장 비용 지불하고(카드만 되고 99,000페소) 아저씨가 여권에 연장도장 찍고 사인하고 끝...
그리고 나왔는데 기분이 너무 좋아서 드디어 비자 연장했다!!! 하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얌전하게 걸어서 집에 왔다. 어휴 메일을 몇 번이나 보내고 마음을 졸인 건지... 일단 금요일 수업을 안 빠져도 되서 너무 좋다. 그리고 큰 걱정거리가 없어져서도 참 좋고. 이제 신경써야 할 건 델레시험준비 하나뿐이다. 오는 길에 항상 지나치는 건물 앞에 있던 아저씨 두 명이 나한테 인사를 하길래 나도 인사를 했다. 근데 이 아저씨들은 전에도 나한테 인사를 했었다... 나한테 아는척을 하는 이유가 도대체 뭔지 모르겠다. 전에 인사를 받았을 땐 너무 당황해서 혹시 아는 사람인가하고(닝겐아 솔직히 그럴리가 없잖슴... 나한테 여기에 아는사람이 어딨어) 머리를 굴리느라 대답을 못했는데 오늘 또 내가 지나가는 걸 보고 인사를 하는 걸 보면 내 얼굴을 확실히 아는 것 같은데. 근데 진짜 왜 인사하는걸까? 물론 내 얼굴 자체가 여기서 너무 튀긴 하고, 여기 산지 이제 2주가 넘었으니까 몇 번 본 사람은 나를 쉽게 기억하겠지만 사서 걱정하는 나답게 무슨 범죄라도 저지르려고 밑밥을 까는 건 아닌가 걱정이 된다.
그리고 나서 재미없는 클래스의 재미없는 숙제를 하고 재미없는 팟캐스트를 다운받아 재미없는 듣기 연습을 하면서 일기를 쓴다...... 델레 B2시험준비반 신청을 받는다는 메일이 왔는데 할지 말지 모르겠다. 생각보다 좀 비싸서... 3인 이상이 되면 하겠다고 할까? 근데 사람이 될 것 같지가 않다. 델레 신청하러 갔을 때 내 기억으론 마지막인지 마지막 전날이었는데 그때까지 접수한 사람이 나까지 세명인가 그랬었다. 뭐 마지막날까지 몇명 더 늘었을수도 있지만 걔네들이 다 B2를 보는건지 알 수 없잖아. 여기 와서 느낀 건 스페인어를 업무에 써먹을 만큼 배워서 자격증을 따고 이걸 직업적으로 쓰려고 열심히 배우는 사람은 한국인밖에 없는 것 같다는 거다. 지금까지 봐 온 모든 사람들은(지금 같은반에서 일 때문에 배우고 있는 스코틀랜드 아재 빼고) 슬렁슬렁 하면서 배우면 배우고~ 내 스케줄 안되면 말고~ 하기싫거나 쉬고싶으면 나중에 하고~ 다들 그렇다. 해외에 나오면 시야가 넓어지고 삶을 사는 태도나 가치관 같은 게 바뀐다는데 이런 것 때문인가 보다. 나는 타이트한 한국에서 살다가 상대적으로 느긋한 콜롬비아에 와서 풀어진 느낌에 어리둥절하지만 반대의 상황이라면 한국에 가서 일하거나 공부하는 콜롬비아 사람은 적응하기 힘들지 않을까 싶다.
어쨌든 마음이 편하다. 이제 공부에만 신경써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