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3일 61일째
오늘로서 메데진에 온 지 두 달이 되었다. 오늘은 집에 오는 버스에서 옆에 앉아 있던 아저씨가 갑자기 말을 걸길래 놀랐는데 알고 보니 에아핏에서 스페인어 배우는 미국인이었다. 아침에 내가 이디오마 센터에 가는 걸 봤다고 하길래 그러냐면서 조금 이야기를 했는데 말하다 보니 머릿속에서 자꾸 스페인어만 튀어나오고 버퍼링 걸린 듯 말이 느리게 나와서 짜증이 났다. 안 쓰다 버릇하니 잊어버리나보다. 분명 처음 와서 아르파나랑 얘기할 땐 별 힘 들이지 않고 영어로 대화했던 기억이 나는데 이젠 스페인어만 자꾸 나온다. i am here to aprender español 이런 식으로 근본없이 ㅡㅡ; 그 아저씨가 라우렐레스에 현지화 되지 않은 한국 맛 그대로의 한국 식당이 있다면서 자기 반에 있는 한국인 학생이 추천해줬다고 했다. 허허 같이 9:00-11:00 시간에 듣는 수업인데 어떻게 한번도 못 본건지 모르겠다. 하이로가 에아핏에도 한국인들 많다고 했을 때 나는 왜 한번도 본적이 없지 했는데 진짜 있긴 한가보다. 어쨌든 이번에도 대화를 마치고 나니까 찝찝했다. 내가 영어를 너무 답답하게 못해서...... 젠장 이러다 서울 가서 토익봤는데 점수가 막 800점대로 떨어지고 할까 걱정된다.
얼른 델레 신청을 해야 하는데 인스띠뚜또 세르반테스에 나온 마감날짜랑 에아핏 홈페이지의 마감날짜도 다르고 에아핏 홈페이지에서 다운로드할 수 있는 델레 신청서가 2018년 꺼라서 내일 학교에 가서 확인을 해봐야겠다. 한국에서 신청했을 때는 별 어려움 없이 인터넷으로 그냥 끝내고 입금확인증을 보내면 됐었던 것 같은데 여긴 무지 귀찮게 프린트 뽑아서 여권 복사한 거랑 같이 내야 하나 그런듯. 이럴 때만은 한국이 정말로 좋다.
우울하고 기운없는 건 지난주 주말에 정점을 찍고(진짜 밥먹으러 두 걸음 앞에 있는 식탁에 갈 때 빼고 침대에서 안 나갔다. 주말이라 다행이었지) 오늘은 조금 기운이 나서 번역봉사를 하려고 노트북 앞에 앉았다. 우리 반 사람들하고 친해지고 싶은데 내가 낯을 너무 심하게 가리고...... 나를 대할 때 모르는 사람에게 하듯 예의바르지만 무심하게 대하는 게 아니라 이 사람이 내게 정말로 조금이나마 호의적이라는 생각이 들기 전까지는 자연스럽게 말이 안 나오는 게 너무 큰 문제라서 힘들다. 차라리 눈치라도 없었으면 상대가 날 지겨워하든 말든 수다를 떨고 볼텐데 그렇지도 못하고 남이 이 대화를 귀찮아하는지 아닌지 너무 쉽게 캐치해버리니까 남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가기가 정말 힘들다. 그리고 존 아저씨는 자꾸 나를 통해서 고국의 젊은이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알고 싶어하는데 나는 좀 짜증이 난다. 지구 반바퀴를 돌아서 여기까지 왔는데 한국 윗세대들이 매일 하는 '~~하니까 그렇지, 내 세대엔 말이야~~' 이런 소리를 들어야 하나 싶다. 요새 한국의 젊은이들이 왜 연애와 결혼을 안하려고 하냐는 물음에 여자들은 결혼과 함께 직장생활과 살림과 육아와 시가갑질의 사중고를 견디느니 결혼을 안하고 말지 싶은거고 남자들은 그런 여자들을 이해 못해서 왜 울엄마는 그렇게 했는데 너는 못해라고 하면서 서로 의견 차이를 보이는 거라고 말을 해도 이해를 못하신다. 아무래도 그분은 가부장제의 수혜자니까 더한거라고 짐작해 본다. 60~70년대에 이민을 간 사람들은 그 시기에 사고방식이 머물러 있다던데 진짜 그런 것 같다. 아니 남자랑 여자가 둘다 일하는 상황에 애가 아프면 공평하게 이번엔 내가 다음엔 네가 반차쓰고 번갈아 데리러 가던가 해야지 아이 양육에 드는 책임을 여자만 떠맡는게 당연시되니까 고용주 입장에서는 그걸 빌미로 더 여성 노동자를 막 대하게 되는거고 남편놈은 니가 비정규직에 돈도 덜 버는데 애를 봐야지 하고 양육책임을 더 떠넘기고 그 악순환인데 치과의사씩이나 되는 머리를 가지고 그걸 이해를 안하려고 하면 나는 할말이 없다. 여자들이 애낳고 키우는 게 목적인 기계도 아니고 우리들도 공부 할것 다 하고 대학 나오고 성공하겠다는 꿈도 큰데 애키우느라 그걸 그만둬야 되면 솔직히 그게 행복하겠냐? 결혼하면 갑자기 시댁에서 노예 취급 당하는 건 어떻고? 몸만 크고 부모한테서 정서적 자립 못한 비웅신 남편들 대신해서 욕먹어가면서 대리효도하고 비위맞추느라 고생하는 건 어떻고 열달동안 임신하고 출산하느라 개고생하는동안 남편이란 사람들은 성매매하고 와서 hpv 옮기고 그것 때문에 수많은 기혼여성들이 자궁경부암 걸리는 건 어떻고 애낳고 몇년간은 몸이 안 남아나도록 애 키우면서 직장생활 병행하거나 돈이 너무 나가고 사정이 안 되어서 직장 그만두고 애 키우는 루트로 가면 하루종일 말도 못 하는 핏덩이랑 집에 갇혀 있다가 우울증에 걸려도 남편은 니가 집에서 뭐 하는게 있냐는 소리나 하면서 돈도 못 버는게 어쩌고 하는 건 어떻고, 남자가 못 되어서 낙태당하고 간신히 태어나선 인간취급 못 받는건 어떻고 연애하다 몰카찍히고 데이트폭력당하고 안 만나준다고 스토킹당하고 맞고 살해당하는건 어떻고...... 여자들이 당하는 모든 것들을 남자들은 본인들이 겪어보지 못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냥 간단하게 무시해버린다. 그걸 이해하려는 노력조차 안 하려고 하고. 진짜 이나라는 그냥 망해야된다. 너무 거지같아서 고치고 땜빵하고 하느니 그냥 다 갈아엎고 맨땅부터 다시 쌓아올리는 게 나아보인다.